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 생깁니다. 상대의 성격이 나빠서, 고집불통이라서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도 멀리 있으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쨌든 갈등이 생기는 사람은 나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에요. 자기중심성이란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를 기준에 놓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 뒤, 좌, 우를 말할 때 실제 공간상에 앞이 있고 뒤가 있고, 좌가 있고
우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기준으로 한 앞과 뒤, 좌와 우가 있다고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고
남편은 남편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고 자식은 자식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럼
자기 기준을 왜 갖게 될까요?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를 중심에 놓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자기 기준을 불교 용어로는 ‘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빠르니 늦으니 하는 분별을 늘 합니다. 그런 분별의 기준은 자신입니다. 상대방도 자기 기준에 따라
분별합니다. 이때 인식의 기준이 서로 다르니 분별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갈등이 생깁니다. 이럴 때, 빠르고 더딘 게 본래 있는 게 아니고,
빠르다느니 더디다느니 하는 분별을 자기가 일으키고 있음을 알면 분별은 일어나더라도 고집을 하지 않게 되므로 갈등이
해소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이해해도 현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일어나 앞서므로 잘 안 됩니다. 그럼 감정적으로는 왜 극복이 안 될까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습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작용하는 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업식입니다. 그 업식이 드러나는 것이 감정인데, 이 감정은
경계에 부딪힐 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이고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럴 때 얼른 이성적으로 돌아가서 ‘이건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깨달으면 그냥 사라지지만, 그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되기도 해서
때로는 10년, 20년, 30년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슴에 못이 박히고, 한이 맺히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마음 작용의 이치를 밝혀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보니까 나에게 이런 감정이
생기는구나.’ 하고 내려놓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행위에 대해서 ‘아 저 사람이 자기 기준에서 보면 저렇게 감정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성질을 낼 때도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반응,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내 감정은 당분간 계속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있지 못해서, 또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경계에 부닥치면 무의식적으로 먼저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 있어라’ 하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일어날 때 빨리 알아차려야 하고, 그래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런 무의식적 반응인 업식이
점점 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순간에 깨어 있는 힘이 커지면 실제 생활 속에서도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초연한 상태가 점점
이루어집니다.
우선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갈등이 있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 내 아상을 내려놓는 연습을 자꾸 해 보세요. 상대가
고집불통이라는 것은 그가 자기중심성이 강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를 보는 내 중심성도 굉장히 강하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 고집 센 성질을
꺾으려는 내 고집도 보통고집은 아니라는 거지요.
누구나
갈등 없이 자기 뜻대로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내 할 바를 다하고, 그렇게 자꾸 해나가면 결국은 해탈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정토 법륜스님-